노트 중심 연구 방법

2024/12/29 (Updated: 2024/12/30). The latest version of this page is available at https://www.pusnow.com/note/note-driven-research/.

나의 박사과정의 상당 부분은 “노트"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연구노트, 회의록, 아이디어 노트 등 다양한 종류의 노트가 있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노트는 이들의 목적 모두를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저 노트라 지칭한다.

나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할 때인 석사 2학년(2019년 1월)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 노트를 주기적으로(대개 주 1회) 작성해 왔고, 돌이켜보면 이 습관이 내가 연구를 꾸준히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지 않았나 싶다.

박사과정을 마무리해 가는 지금, 나의 연구 방법인 “노트 중심 연구 방법"을 정리하여 소개해 본다.

왜 작성하는가?

연구실마다 연구 진행 방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주 1회 정도로 주기적인 연구 회의를 통해 연구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연구 회의에서 어떤 학생들은 연구 내용을 별도의 자료 없이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생각나는 데로 나열하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전달해야 할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거나 논리적인 오류가 생기기 쉽고 몇 내용은 빠뜨리기도 한다.

나는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항상 회의 하루 전쯤에 노트를 작성한다. 노트는 회의에서 논의해야 하는 내용을 간략히 담고 있으며, 나는 이 노트를 회의에서 TV 등으로 보여주며 회의를 진행한다.

회의 하루 전 노트를 작성하는 습관은 여러모로 많은 장점을 가져다준다. 기본적으로는 전달해야 하는 내용을 논리적 순서대로 빠뜨림 없이 전달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지만 이것만 성공해도 그 회의는 성공적이다. 두 번째 장점으로는 노트를 작성하면서 연구의 논리적 흐름을 다시 한번 점검하게 된다는 점이다. 생각으로는 허점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선택들을 막상 글로 작성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실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실수들을 고치면서 연구를 논리적으로 더 탄탄하게 진행할 수 있으며, 생각이 정리되면서 회의 때 논리 전개를 더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생성한 노트들을 쌓으면 연구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연구 기록이 되고 연구 내용 추적이 용이해진다. 연구를 1년 이상 지속하게 되면 과연 연구 진행 내용을 찾아볼 일이 종종 있다. 예를 들면, 과거에 한 번 시도했던 방법을 지금 시점에서 다시 검토해 봐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보통 과거에 왜 실패했는지 혹은 어떤 단점들이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때 과거 노트를 참고하면 그 당시 선택과 결과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과거에 했던 잘못된 선택을 기억하지 못해 다시 선택하는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연구하다보면 내가 주도하는 연구임에도 진행 상황을 생각보다 많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현재 연구 진행에 집중하다 보면 1~2주 전에 진행한 연구 내용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이때 나는 노트를 많이 활용한다.

어떻게 작성하는가?

노트를 작성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위 목적을 달성한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노트를 작성한다.

No PowerPoint

노트를 처음 작성하기 시작할 때쯤 Amazon의 6-pager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확히 어떤 글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이런 이었을 것이다. 이런 비디오도 있고 구글에 Amazon 6-pager로 검색하면 아주 많은 글이 있다. 간략히 요약하면, Amazon에서는 회의할 때 PowerPoint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고 서술식으로 작성된 6페이지의 구조화된 문서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또, 회의를 시작할 때 조용히 몇 분에서 몇십 분 동안 조용히 준비한 문서를 읽고 논의를 시작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모든 회의의 구성원들이 공통적인 이해를 가지고 더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있으며 정보/논리 전달시 비주얼과 개조식 서술에 숨겨지는 빈틈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밖에 PowerPoint보다 단순문서 형태가 주는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몇 가지를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다른 무엇보다도 PowerPoint를 회의에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가장 6-pager에서 공감이 되는 내용이었다.

Agenda-Narrative Bullets 구조

Amazon에서 사용하는 6-pager는 효과적인 회의 방법일 것이다. 다만 이를 나의 연구 환경에서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움이 많았다. 6-pager를 회의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회의 구성원 간의 합의가 필요하다. Bezos와 같은 CEO의 결정이 없이 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특히, 바쁘신 교수님을 앉혀놓고 몇십 분 동안 가만히 서술식으로 작성한 글을 매주 읽히게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또, 6-pager의 구조(Introduction, Goals, Tenets, State of the Business, Lessons Learned, Strategic Priorities, Appendix)는 연구보다는 사업에 관련된 내용이고 형식적으로 써야 하는 글이 많아 매주 작성하기에는 조금 부담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6-pager와 달리 조용히 문서는 읽는 시간 없이 바로 발표에 활용할 수 있는 형식으로 노트를 작성하였다. 그럼에도 6-pager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내가 선택한 형식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agenda-narrative bullets 구조이다. 가장 상위 레벨의 섹션은 agenda로 하고 그 아래에 bullets으로 내용을 작성하되 문체는 서술식으로 하는 방식이다.

상위 레벨을 개요, 배경 설명 없이 바로 안건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이 내용들은 이전 노트로 갈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번 반복적으로 작성 및 설명하기보다 바로 안건으로 들어가고 필요하다면 바로 과거 노트로 돌아가 설명한다. 따라서 노트 작성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회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 회의는 섹션으로 구성된 안건들을 하나씩 논의해 가면서 진행한다.

6-pager에서는 bullets를 금지하고 서술식으로 문서를 작성하라고 한다. 하지만, 서술식으로 작성하게 되면 문서를 가지고 발표를 하게 되면 여러 애로사항이 발생한다. 슬라이드 없이 논문만 가지고 발표를 해보면 알 것이다. 서술식으로 작성된 글은 조용히 앉아서 읽기에는 좋은 방식이지만, 발표에서 아이디어를 전달하기에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계속해서 글의 흐름을 파악해야 하는 등 별로 좋지 않은 방법이다. 따라서, bullets을 이용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구조를 잡되 서술식으로 문장을 작성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Bullets을 사용하면 주장-근거, 원인-결과 등을 nested bullets로 표현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돼 글의 논리적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각 문장은 서술식을 사용함으로 문장을 개조식으로 작성했을 때 생기는 문제점인 정보의 탈락과 빈틈을 줄인다. 특히 고 맥락 언어인 한국어에서는 생략이 쉽기 때문에 개조식으로 작성하다 보면 많은 정보가 필요하지만 생략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서술식 문장의 단점인 공간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은 PowerPoint가 아닌 일반 문서 형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반 문서 형식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PowerPoint 대비 비교적 많기 때문에 문장이 길어지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시

내가 DiLOS 논문을 작성했을 때 사용했던 노트 하나를 공유한다 [첨부]. 파일을 보다 보면 알다시피 위 원칙을 철저히 지켜서 작성하지는 않는다.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때그때 위 방식을 조금씩 변형하여 작성하고는 한다.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가?

노트를 작성하기 위한 툴로 나름 많은 애플리케이션을 고려해 봤다. 다음 내용을 주요 결정 인자로 각 애플리케이션을 평가하였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사용해 봤지만 진지하게 한 달 이상씩 사용했던 프로그램은 Notable, FSNotes, Notebooks이다. Notable은 조금 무겁다는 느낌이 있었고(당시 내가 사용하던 노트북의 사양이 몹시 좋지 않았다.), FSNotes는 사용했을 당시 완성도가 조금 부족했다(특히 iOS 애플리케이션이 부실했다.). 결국 유료이지만 Notebooks 애플리케이션에 정착해서 몇 년 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하고 있다.

Notion등에 대한 생각

어느 순간부터 Notion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나도 이를 노트 작성 용도로 고려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위 세 가지 작성 용이성, 탐색 용이성, 플레인 텍스트를 잘 만족한다는 인상이 들지 않았다. 각 기능을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기존 애플리케이션 대비 장점을 찾지 못했다.

Notion 등의 애플리케이션의 장점 중 하나는 non-linear 노트 테이킹 기능이 강하다는 점이다. 기존 시간 순서대로 노트를 작성하는 것이 아닌, 위키처럼 토픽 위주로 문서를 작성하고 그 문서 간 하이퍼링크 등으로 연결을 시키는 구조이다. 이 구조는 지식베이스 등을 구축하여 체계화된 지식을 구축하고 공유하는 데는 용이하지만, 계속하여 변화하는 진행 중인 연구를 트래킹하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또, 회의 진행 중에 하이퍼링크를 통하여 여러 문서를 이리저리 이동하며 발표하는 것은 너무 산만하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TiddlyWiki, Notion, Obsidian, LogSeq 등을 고려해 봤지만, 기존 도구 대비 큰 장점을 찾을 수 없어서 도입하지 않았다.

한계와 향후 과제

노트를 활용한 지금의 워크프로에 큰 불만은 없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몇 한계점이 있다. 그중 다음 내용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생성된 노트는 주로 회의에만 사용되고 체계화된 저작물(논문 등)을 생성하는 데는 활용되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들면, 논문을 작성할 때, 작성한 노트를 참고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고 기억에 의존하여 새롭게 작성하게 된다. 이 방식은 여러 문제를 발생시키는 데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모든 연구 진행 과정을 항상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논문을 작성할 때 디테일이 때때로 누락되거나 달라진다는 점이 있다. 그렇다고 논문을 작성할 때 노트를 계속 참고하며 작성하기에는 시간 순서대로 나열된 노트는 검색의 도움을 받더라도 정리가 잘되지 않아 불편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간 순서대로 나열된 노트를 어떤 식으로든 체계화하여 지식 베이스의 형태로 정리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주기적으로 지식 베이스의 형태로 노트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는 연구 일정에 따라 우선순위에서 밀려 꾸준히 작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다. 앞으로는 LLM의 사용을 고려해 볼 예정이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작성한 노트를 인풋으로 두고 아웃풋을 체계화된 구조로 유도한다면 논문을 작성할 때 사용할 만한 중간 정도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